안녕하세요. 기백 있게 으흠으흠으하핫 핫돌입니다.
2024년 05월 12일 오늘 저는 푸른 화창한 날씨가 너무 좋아서 안국역 운현궁을 산책했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외국인과 초등학생의 현장실습 할머니 할아버지가 놀러 온 모습이 보였는데요.
어제 우중충했다 시원하게 내리던 비 내리는 날씨와 다르게 산뜻한 날씨에 많은 사람들이 산책도 하고 나들이를 나온 것 같습니다.
운영시간 (매주 월요일 정기휴무) 09:00-19:00
위치는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464 운현궁입니다.
자세한 위치는 네이버 플레이스를 이용 부탁드립니다.
https://m.place.naver.com/place/11619094/home?entry=plt
운현궁 :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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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집이다. 이 집은 서운관이 있던 고개에서 유래된 지명을 따서 운현궁이라 불렀다.
흥선대원군은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정권을 잡아 이곳에서 10여 년간 정치를 했다.
1864년(고종 1)에 노락당과 노안당을 짓고, 1869년(고종 6)에는 이로당과 영로당을 세웠다. 1912년에는 양관(서양식 건물)을 세워 손님을 맞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노안당은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논의하던 곳이며, 노락당은 안채, 이로당은 별당으로 쓰였다. 그 규모나 격식, 평면 모양으로 볼 때, 사대부집이라기보다는 궁궐 내전에 가깝다.
*서운관: 조선 시대에, 천문•재상•역일•추택 따위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
운현궁 입구에서 들어오면 바로 보이는 곳.


운현궁 내 유물전시관과 운현궁 내 유물전시관 설명.
유물전시관은 운현궁의 가치와 조선 후기 사회상을 알 수 있도록 운현궁과 흥선대원군 관련 유물을 전시한 공간이다.
전시 공간은 18개로 구분하여, 고종 초기 국내외 사건을 비교한 연대표와 운현궁 모형,
왕과 왕비의 가례를 올릴 때 착용한 예복, 대원군 교의 척화비 당백전 운현궁의 각종 생활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교의: 제례 때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단.
척화비: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나라 곳곳에 세웠던 비석.
당백전 : 1866년에 발행한 화폐로 그 당시에 통용되던 상평통보 100개에 맞먹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흥선대원군(출처:네이버 백과사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1294&cid=59015&categoryId=59015) 흥선대원군 이하응(昰應, 1820~1898)은 아들 고종의 즉위로 조선 역사상 유일하게 왕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었으면서 살아 있는 왕의 아버지로 대원군에 봉해지고,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는 섭정을 맡게 되었다. 그가 정치를 주도했던 19세기 후반 조선은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서세동점이라는 새로운 세계사적 흐름과 세도정치로 피폐한 국가의 재건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야 했던 흥선대원군은 오늘날 한편에서는 개혁 정치가로, 다른 한편에서는 보수적인 국수주의자로, 엇갈린 평가를 받고있다.


*친영례 복식:
왼쪽부터 부대부인의 녹색 원삼, 흥선대원군의 적색 조복, 명성황후의 홍색 적의, 고종의 현색 면복으로 순서가 이루어짐.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중의 친영례, 고종은 면복을, 명성황후는 적의를 입었으며 흥선대원군은 조복을, 부대부인은 원삼을 입었다.
가례란 왕실 혼례로서, 별궁으로 사자를 보내 청혼하는 의식인 납채, 대궐에서 예물을 보내는 의식인 납징, 길일을 택하여 별궁에 알려주는 의식인 고기, 왕비 책봉을 받도록 하는 의식인 책비, 왕이 별궁으로 왕비를 맞으러 가는 의식인 친영, 왕과 왕비가 서로 술잔을 나누고 첫날밤을 치르는 의식인 동뢰의 육례에 의해 치러졌다.
그 후 왕실의 웃어른께 인사를 올리는 조현례 백관의 하례를 받는 진하의례, 종묘에 고하는 묘현례를 행하는 것으로 가례의식을 마쳤다.

*척화비:
1871년(고종 8) 서양을 물리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크기는 가로 25.5cm. 세로 21cm, 높이 144cm로 화강석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친을 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니 이를 자손 만년에 경고하노라.“ 내용이 새겨져 있다.
척화비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서구 열강의 통상압력을 비롯, 남연군의 묘 도굴사건 등이 발생하여 통상 거부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운현궁 이로당:
지정번호 : 사적 제257호 / 시대: 1864년(고종 1), 1996년 중수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64
이로당은 노락당과 함께 운현궁의 안채로 쓰였다. ‘이로’는 흥선대원군과 부대부인 여흥 민씨를 의미하는 말로 해석한다.
앞쪽에 자리한 노안당과 노락당보다 뒤늦은 1869년(고종 6)에 지었다.
정면 7칸, 측면 7칸 규모로 평면은 ㅁ자형이다.
실내는 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다.
굴도리를 쓴 민도리집인데, 사면의 가구구조에 차이를 두어 공간의 위계를 드러낸다.
궁궐과 흡사한 평면구성과 창호, 차양 같은 세부 기법은 노락당, 노안당과 같은 수준으로 품격을 갖추었다.
이로당 뒤편의 운나동 김승현 가옥(민속문화재 제19호)은 원래 운현궁에 속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영로당’ 이라고 불렀다.


*운현궁 노락당:
지정번호 : 사적 제257호 /시대 : 1864년(고종 1) 1996년 중수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64
노락당은 운현궁의 안채로서 노안당과 같은 해인 1864년(고종 1)에 지었다.
정면 10칸, 측면 3칸으로 평면은 -자형인데,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온돌방을, 앞뒤로는 툇간을 둔 궁궐 내전 평면구성을 보여준다.
복도각을 통해 이로당까지 이어지게 한 방식은 운현궁의 특색이다.
노락당은 운현궁 안에서 유일하게 기둥머리에 의공(새 날개 모양으로 뾰족하게 생긴 공포의 일종)을 장식하여 가장 높은 위계를 드러낸다.
여러 세부 기법은 조선 말기 궁궐 건축에 버금가는 수법으로 손꼽힌다.
1866년(고종 3) 고종과 명성황후는 노락당에서 가례를 올렸다.
노락당에서 이로당 가는 길.
이로당 노락당 노안당이 이어지는 운현궁 전체의 뒷길 1.
이로당 노락당 노안당이 이어지는 운현궁 전체의 뒷길 2.
2024년 05월 12일 일요일 오늘은 제가 햇살이 너무 좋아서 안국역에 있는 운현궁을 방문했는데요.
운현궁 안에는 기획전시실이 있어 개인 전시를 하시는 분도 계셨고, 연도별로 따로 정리가 된 조선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사건 사고들도 정리되어 있었지만 보여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또, 독자님들께 운현궁이라는 곳에 넓은 부분을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에 업로드한 영상들이 움직이는 듯한 어지러운 기분이 드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햇살이 너무 좋아서, 고요함이 너무 좋아서, 따뜻함이 너무 좋아서 제가 움직였던 만큼 행복하고 따뜻했던 만큼 독자 여러분도 기백 있고 따뜻한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백 있게 으라차차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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